아브라함 혼자 있을 때에 (이사야 51:1-6 사도행전 3:1-10)
방금 감상하신 연주 영상은 드보르작의「신세계」입니다. 체코 출신의 그가 잠깐 미국에 건너가 살면서 그곳에 잡혀 온 아프리카 흑인들, 그리고 각지에서 끌려온 인디언들의 고통스런 삶을 보면서 그들을 위로하고자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고향」이라는 부제가 붙은 배경입니다.
본문도 비슷한 상황 얘기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럽니다. 성경은 읽을수록 은혜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은혜를 받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글쓴이의 삶의 자리를 아는 일입니다. 본문도 그렇습니다. 평범한 말씀이 아닙니다. 저자 제 2 이사야가 처한 상황이 암담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해 끌려간 포로민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던 상황에 처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그 동포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같은 말씀이 그런 상황에서 고백됐다는 점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혼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불러 창대케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옛부터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으니, 그러므로 지금 자신들에게도 신세계를 열어 주실 것이라 고백한 겁니다. 감탄할 일은 그런 고백이 단발성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선조들의 고백을 계속 되뇌이고, 또 조명하곤 한 겁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더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땅에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 하나님이 노아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였더라 (창 9:) 모세야, 이제 가라 내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출 3:)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이 그런 그들이 집대성한 작품이었다면 믿어지십니까?
더 놀랄 일은 그 고백의 기도를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결국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 귀환시켜 성전을 재건케 하는 등 새로운 세상을 펼치셨으니 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싹을 키워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힘을 내십시다. 승리의 영이 임하실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한마디 묵상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황폐한 곳들을 에덴같게 하였나니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