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을 주리라 (민수기 6:22-27 고린도전서 15:57-58)
막내야, 막내 네가 살고 있는 아산에 우리 가정 가족 묘지를 준비하자. 두 달 전쯤 일입니다. 고향 서천의 큰 형님께 점심 대접하러 갔었는데 갑작스럽게 하시는 말씀이 그랬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 제가 물었습니다. 부모님 유골은 어떻게 하고요? 다 모시고 가자! 다행히 아산 관내에 괜찮은 공원묘지가 있어 결정해 놓고는 묘비에 새길 성구를 고민하다가 선택한 말씀이 본문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평강 주시기를 원하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이같이 내 이름으로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인데요, 그러나 사실 앞뒤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조금 의아한 구절입니다. 바로 앞절의 나실인 얘기와 뒷절의 헌물 규정들 사이에 끼어있는 듯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정들 사이에 갑작스럽게 축복의 말씀이 삽입되어 있는 겁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축복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 은혜임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임재가 대표적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의 선물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랬을까요?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성지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야곱 보세요. 머나먼 이국 땅 애굽에서 죽습니다만, 굳이 가나안의 성지에 묻어달라 유언합니다. 이에 제국의 총리 요셉이 할 수 없이 직접 이스라엘까지 가서 장례를 치루기까지 합니다. 요셉이 야곱을 가나안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 (창 50:13) 대단히 어려운 행차였을 텐데도 그랬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조차도 그렇게 유언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후손들도 그를 가나안에 묻었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왔으니 … (출 13:19)
막내 시동생이 묻힐 곳에 나도 가고 싶어요. 경제적인 부담은 다 할테니 묘비에 새길 축복 말씀을 잘 선택해 주세요. 장로이신 큰 형수께서 굳이 목사 곁으로 오고 싶으신 마음도 그런 신앙 전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편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늘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한 우리의 모든 후손들이 유대가문 못지않은 축복 받기를 … 바울사도의 말씀으로 결론을 삼고 싶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라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